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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추억의 누군가에게(너의 취장을 먹고 싶어 후일담).
- 스미노 요루 -
자신의 평범함이 싫다. 평범하다는 건 보통이라는 말이니까.
평범한 가정 환경, 평범한 학교 생활, 평범한 운동 능력, 평범한 학력, 평범한 외모, 평범한 취미.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평범하다는 말을 지루하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역시 평범한 이유로 부모님과 싸운 다음 날 우연히 아빠가 바람을 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충격이었던 건 맞지만, 반대로 가슴이 콩닥대고 있었다. 드디어 내 인생에 평범하지 않은 무언가가 찾아와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조금 들뜬 채로 소꿉친구에게 평소는 가지 않는 역 근처 카페로 변장하고 오라고 했다.
"분명, 후유의 착각이라니까."
안즈(*살구를 뜻함)의 이름과 어울리게 탱글탱글한 입술에서 한숨이 나왔다.
"아니라니까, 나도 그런 아저씨의 어디가 좋은지….하고 생각은 하거든? 할 건 하고 있답니다."
"어머, 그러세요."
안즈는 흥미없다는 듯이 아이스 카페오레를 마시며 읽던 책으로 시선을 떨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엔 쓰지 않는 버킷 햇에 평소에는 쓰지 않는 (안경 알이 없는 패션용) 안경, 잠입용 변장은 완벽한게 기합이 단단히 들어있다.
이런 식으로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안즈는 주위에서 보면 평범하지 않은 듯 보여서 그런지 미스터리하다던가 해서 의외로 인기인이다.
어릴 때부터 친구인 나는 이 애가 그냥 쓸데없는 힘을 쓰지 않고 적당히 하는 방법을 너무나도 잘 아는 것뿐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적당히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평범하지 않은 거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는 만큼 부럽다. 게다가 얼굴이 평범하다고 말하기엔 너무 귀엽다는 것도 부럽다.
"뭐, 오랜만에 후유와 만나는 거라 기쁜 마음에 오긴 했지만…."
"엊그제 안즈네 방에서 뒹굴거렸는데."
"그래서, 어째서 아저씨가 바람을 피고 있다는 그런 생각 한 거야?"
나는 쓰고 있던 모자의 챙을 살짝 들어 올리며 "음…."하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어떤 순서로 설명을 해야 안즈를 납득시키기 쉬울까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엔 적당한 안즈에겐 적당한 설명이면 충분하겠지, 하고 어렵게 생각하는 걸 관뒀다.
"감"
안즈가 하아아…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남자한테만 휘둘리기만 하는 후유의 감이 아저씨가 바람피고 있다고 말하는 걸 믿을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봤는데, 그걸 알 정도라면 이상한 사람에게 휘둘릴 리가 없으니까 그런 걸로 이 더운 날에 나를 불러낸 것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겠다, 고 생각했어!"
"쓸데없이 긴 말로 산소 낭비하지 말라고. 그리고 이상한 게 아니라 자유인이거든."
"자유인은 이상하다는 의미니까. 그렇게 표현하는 사람도 그거랑 비슷하지."
안즈는 무심한 표정으로 심심풀이인 것처럼 거북한 곳을 정확하게 찌른다. 그런 녀석을 싫은 녀석이라고 하거든요. 안즈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마음이 꺾여버린 도전자들을 여럿 알고 있다. 하지만 나도 폼으로 지금까지 안즈랑 같이 있는 게 아니라고.
"그, 뭐였더라? 사귀던 남자였나? 묘하게 신경질적인게 짜증난댔나? 선생님네 자식이랑 사귀는 것 같댔나? 그런 말 듣고 차인 안즈가 말이에요,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거에 트집을 잡고 싶어하는 건 알겠는데 말이죠?"
"죽는다 파더콤."
우린 서로 눈을 흘기면서 째려보다가, 누가 먼저라고 할 거 없이 이 분위기가 귀찮아져서 관뒀다.
"후유의 감에 여름 방학 하루를 낭비할만한 의미는 있어?"
그래, 지금은 여름방학이다. 꽃다운 여고생인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귀중한 하루.
"안즈네 방에서 둘이 인생 게임을 하는 것보다야 현실에 영향을 줄 걸. 우리집 가정이 무너지면 안즈네 집 아이로 받아줘."
"우리 엄마 아빠, 진짜로 받아줄 거 같으니까 진짜 그런 거 자제좀. 나는 지금처럼 외동딸로 사랑받으면서 자라고 싶거든."
"그럼 우리 아빠가 바람피는 걸 밝혀내서 엄마에게 들키기 전에 관두게 하는 걸 도와줘. 그리고 난 그걸 나중에 싸울 때 빌미로 써먹을 거야."
"또 혼났나보네."
"싸웠거든? 진짜 짜증난단 말야."
"시간 낭빈 것 같은데…."
어차피 결국엔 같이 갈 거면서 솔직해지지 못하는 안즈. 솔직해질 이유를 주기 위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왜 아빠에게 바람핀다는 혐의를 씌웠는지 정확하게 말해주기로 했다. 딱히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아빠가 올 거라 예상되는 시간까지는 여유도 좀 있고. 난 안즈와는 달리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거나 하는 게 좀 힘들어서 심심하니까.
그러니까 이런 거다. 아빠가 젊은 여성이랑 통화하는 걸 듣고 말았다. 어제 저녁, 아직 분노의 불길이 가시지 않은 나는 늦게 귀가한 아빠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한 마디도 섞지 않았다. 일찍 2층에 있는 내 방에 들어가 잡지를 본거나 게임을 하거나 하다 보니 어느덧 밤 12시였다. 미리 양치를 해둘까 싶어 1층으로 내려오니 이미 불은 꺼져 있었다.
안심하곤 세면장에서 양치를 한 뒤, 부엌에서 차를 마시고 있자 문득 현관 가까이 있는 아빠방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딱히 흥미도 뭐도 없었지만 몰래 잠이 덜 깬 척하며 다가자자, 평소보다 훨씬 다정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다정함을 딸에게 사용하면 어떻겠냐고 짜증난 것도 잠시, 아빠가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도 분명하게 이름으로, 그것도 쨩이라는 어미를 붙여서. 아빠는 이후 상대에게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며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서둘러서 내방으로 돌아왔다.
"회사 후배라던지 아냐? 여성 비율 높으니까."
"우리 아빠 부하 직원도 씨라고 부르니까. 그건 아냐."
"그래서 저기 시계탑 있는 곳에 아저씨와 그 여자가 온다는 거네. 헛걸음했다면 파르페 사."
"증거를 잡으면 사 줄게."
"결과와 상관없이 노력한 만큼의 대가는 받아야지."
"성과제로 안 하면 너 아무것도 안 할 거면서, 앗!"
옅은 하늘색 셔츠에 감색 넥타이, 수수함이라는 걸 꾹꾹 눌러 담으면 저렇게 되는게 아닐까 싶은 모습으로 우리 아빠가 옆 앞의 상징적인 곳인 시계탑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다. 나도 모르게 몸을 숙이는 나. 모자와 선글라스까지 쓴 완벽한 변장이라고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후유, 제발 부탁인데 진짜 여성이 왔다고 해서 울고불고하지만 말아줘."
"소꿉 친구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빠가 바람을 피우지 않는 다는 걸 확인하고 안심하고파하는 파더콤."
시시한 안즈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나는 가만히 아빠를 관찰한다. 어딘가 얼굴이 헤실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나와 엄마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과 맞물려 살의가 솟구쳤다.
"어떤 년일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것뿐인데, 안즈는 특별히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내뱉는 천재 같은 말을 했다.
"후유네 엄마가 젊었을 때랑 닮았다면 최악이네"
"죽인다."
"부모를 죽인다거나하는 그런 말 하면 안 돼."
"너 말야."
"나?"
헛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내가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파더콤이 아니지만 생각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런 건 아닌 것 같다는 걸 금방 알게 되었다. 일단은 안심.
하지만,
"젊네."
나보다 먼저 안즈가 말했다. 걸어다니는 수수함 같은 아저씨에게 찾아온 건 우리와 다섯 살이 채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이는 여자애였다. 난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 안즈, 그렇게 쳐다봐도 안 울거거거든."
지금은 놀라움이 더 크다. 아니, 당연히 쇼크도 있는데 그게 아니다. 설마 저렇게 어린 애가 올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
아니,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어린 거 아냐?
원조교제라는 단어가 뇌리에 떠오른 순간, 두 사람은 가볍게 말을 주고받고 역을 향해 걸어가려는 듯했다. 이 근처에 있는 유흥가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 같지는 않아 안심했다.
"갈까."
나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의욕이 없어 보이는 척을 하고 있는 안즈의 팔을 잡아당겨 함께 가게를 나섰다.
시선을 최대한 낮추고 몰래 개찰구를 빠져나가니 바로 앞에 있는 1번 승강장에 두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들키지 않게 둘의 등을 몰래 돌아서 거리를 두었다. 전철에 올라탄 이후 둘이 타는 칸 옆으로 이동하자는 계산을 세웠다.
"부모랑은 같은 칸엔 안 탄다니, 사춘기 애도 아니고…."
"사춘기아니면 넌 뭔데….. 그보다 안즈, 두 사람 이야기하는 거, 뭐라도 좀 들려?"
"으음~, 속닥속닥하구 있어."
날 놀릴 생각으로만 가득 찬 안즈는 무시하고, 난 저 애가 어떤 사정으로 우리 무뚝뚝한 아빠와 알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나의 희망과는 무관하게, 아무래도 원조교제라는 선은 흐릿해지고 있었다. 단순한 원조교제라면 여자애가 구태여 활동하는 시간을 피하겠지. 거기에 대낮이라는 것도. 보는 사람 많으니까. 그럼, 진지한 교제? 그렇다고 하면 어디서 만났을까. 설마 순정만화같이 운명적인 만남이 아빠에게 있었을거라 생각할 수도 없다. 직장 사람들은 몇 번 만났던 적이 있지만, 이렇게 젊은 사람은 없었을 터였다. 설마, 신입사원에게 손을 댄 걸까. 그렇다면 더더욱 실망이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전철이 와서, 아빠와 여자애가 타는 것을 확인한 후 우리도 탔다. 열차 안을 몇 칸 이동하자 나란히 앉아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두 사람이 다음 차량에 있었다. 차량 연결부에 창문이 있어 다행이었다. 끝자리에 앉으니 두 사람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잘 보였다.
"러브러브하네."
"아직, 그런 거라고 정해진 건 아니야."
"바람이라고 말한건 후유거든."
안즈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그녀는 보라는 듯 한숨을 쉬며 ‘애초에 왜 혼났, 미안, 싸웠어?’하며 내 볼을 콕콕 찔러댔다. 그 손가락, 먹어버리겠어.
안즈를 바라보지 않고, 나는 며칠 전 있었던 다툼을 떠올린다.
사소한 일이었다. 정말 사소한 일. 우연히 TV에서 나오던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 날 아빠가 일찍 퇴근하고 집에 와 있었다. 내가 거실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고, 아빠는 식탁에서 저녁을 드시고 계셨다. 그런 평범하고 따분한 일상에 매일매일 따분해 지겨워졌기에, 영화에 시선을 둔 채 스마트폰을 만지며 나도 모르게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긴 인생은 시시하네."
마침 영화가 그런 주제였던 거다. 딱히 대답을 바란 것도 아니었는데, 아빠가 입을 열었다.
"안 그래."
그 역시, 우연이었는지 모른다. 아빠의 목소리 톤이 잡담이라기보단 설교에 가깝게 들려서, 내 뇌 안쪽 어딘가에 있는 어떤 센서를 건드렸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시시해. 평범한 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이대로 60년 정도? 희망이 안보여-."
더 이상 내가 이야기를 진행하지 않았으면 됐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쁜 건 아빠다. 모처럼만의 가족의 단란함을 깨버린 건 그 사람이다.
좀 전에 했었던 말의 연장선에 있었기에 말했을 뿐이다.
"시시하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 보다는, 극적으로 죽는 사람의 인생이 더 나아보여."
"후유미."
이름이 불려서 뒤를 돌아봤다. 아빠는 똑바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그 표정은 분명 뭔가 설교를 하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 아무 말이 없어도, 세상의 고교생들이 대게 다 그렇듯이, 난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니,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세상에는 더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라는 그런 시시한 소리 하는 거야?"
"그래."
"결국엔, 시시한 나의 시시한 아빠인거네."
거기서부턴 더 이상의 자세한 회상은 필요 없을 정도로 추잡한 싸움이 이어질 뿐이었기에, 말다툼으로 바뀌어 귀찮아져버린 시점에서 난 내 방으로 올라갔다. 나중에 방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무시했다.
전부 다 안즈에게 설명했다간 또 꼬투리 잡힐 것이라 생각한 나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에 관해서, 구나."
당연히 곤란한 부녀네, 하고 말할 줄 알았기에 힘내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더니, 안즈는 예상외로 "흐-음"하고 맞장구를 쳐줄 뿐이었다. 가끔식 이렇게 반응이 오면, 쓰러질것 같다. 물론 비유적인 의미로, 진짜 넘어지거나 하지는 않지만.
얼마간을 흔들리는 기차 안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이윽고 어떤 역에 전차가 멈추고, 아빠와 여자애가 일어섰다. 먼저 아빠가 일어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오늘의 호스트는 아빠인 것 같다. 아무래도 좋은 거지만 아빤 엄마랑 사귈 때 어떤 데이트 플랜을 세웠을까. 분명 별 거 아닌 거였겠지.
문고본을 읽고 있던 안즈를 재촉해서, 우리도 전철에서 내린다. 다행히도 그 둘은 이쪽에 등을 보이고 있었다. 여펭서 안즈가 크게 기지개를 켠다.
"꽤나 멀리까지 왔네."
"그러게, 처음 와봤어."
승강장에는 사람이 적고, 역 주변 역시 활기차다고 할 수는 없는 곳인 것 같았다.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데이트하기에 좋은 은 장소는 아니겠지.
"여자를 숨길만한 집을 빌리기에 좋은 곳일려나."
안즈가 내 마음을 읽은 듯이 또 싫은 소리를 한다. 만약 그런 짓을 한다면 아빠를 협박해서 임대료 전부를 내 용돈으로 만들어 버릴거다. 안즈에겐 안 줄거다.
충분한 거리를 두고 뒤를 쫓아 개찰구를 빠져나오니 눈 앞에 로터리가 펼쳐져 있다. 여기서 버스나 택시를 탄다탄 힘들 것 같다는 내 걱정을 앞에 있는 두 사람이 헤아린 건 아니겠지만, 정류장을 무시한 채 걸어서 로터리 안 쪽의 언덕길을 올라갔다. 보니까 아빠 일행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역에서 그쪽을 향해 가고 있다. 언덕 너머에 눈에 띄는 건 없다. 그저 언덕이 보일 뿐이다.
으~ 운동 안하고 싶어, 하며 투덜대는 안즈를 이끌고 우리도 그들을 따라 언덕으로 향하기로 했다.
"안 돼-, 이렇게 더운 날 운동하면 죽어버리고 말거야!"
"안 죽거든?! 안즈를 보면 정말이지 부모로부터 유전이라는 말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해."
"제일 비싼 파르페를 사주지 않으면 죽어버릴거야!"
"급료 비싸!"
하기 싫어하는 표정을 표현하고 있는 이 성가시고 여우 같은 여자를 데리고 돌아다니는 건 꽤나 골치가 아픈 일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불안하니까 안즈가 부디 곁에 있어주었으면하는 것도 사실이다. 나도 성가신 여자이기에 분명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친구로 잘 지낼 올 수 있었던 거겠지.
이런저런 장난을 치며 올라가다보니 금세 등줄기에서 땀이 흘렀다. 자판기에서 물을 사서 안즈와 나눠 마시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던 도중 기운차 보이는 아저씨 아줌마에게 추월당했을 때엔 누구 먼저라 할 거 없이 서로 실없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도대체, 아빠는 어디로 가기에 이런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걸까? 그 답은 의외로 금방 알 수 있었다. 언덕 끝에 길게 뻗어 있는 돌계단을 발견하고, 옆에서 ‘이제부턴 가족들의 문제라고 생각해’라는 말이 들려오는 순간이었다.
차를 타고 온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주차장을 안내하는 커다란 안내판이 있었다.
"안즈, 묘지야."
"아, 응, 묘지? 묘지야? 그렇구나…."
더위로 인해 어휘력과 사고력을 완전히 잃은 우리는 앞의 두 사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계단을 오른다. 도중에 자꾸만 안아달라니 업어달라니 하는 어린애 같은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아빠를 추궁한 뒤 파르페를 먹여주면 이 꼬맹이의 기분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다.
드디어 계단은 다 올라간 그 순간, 그 앞에부턴 완만한 언덕이 보이자마자 내 안의 아드레날린이 분출한 탓인지 앞에 가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가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생아, 같은 걸까?"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
지친 안즈에게 계단을 올라오며 지친 사람들을 노리고 만든 게 분명해 보이는 절묘한 위치에 있는 자판기에서 주스를 사 주었다. 묘지에서 진짜로 죽으면 잠자리가 안 좋으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까지의 오르막과 계단에 비하면 앞에 있는 길은 꽤나 완만했다. 길 좌우로 묘지가 많이 있어서 가끔 특이한 형태의 묘지가 나타나면 그 모습에 감탄하며 아빠 뒤를 따라갔다.
어느새 지면은 석조로 바뀌어 있었다. 앞의 두 사람(아빠)은 아직 성묘를 할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도대체 누구의 성묘를 하러 온 것일까. 좀 있으면 오봉(백중)인데, 그거랑 관련이 있을까. 솔직히 말해 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아빠 친구가 근래에 돌아가셔서, 그 딸과 함께 성묘를 온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름이 돋았다. 시시한 우리들의, 시시한 결말. 그런 건, 바라지 않았어.
계속 걸어가자 조금씩 불필요한 것들이 깎여 나가듯 주변이 조용해졌다. 자신의 발소리가 귀에 들리고, 바람 소리가 난다.
우리가 묘지의 물 웅덩이 옆을 지날 즈음, 앞의 두 사람은 짧은 계단을 올라갔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우리도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른다. 바람이 내 편이 되어준 걸지도 모르겠다. 이제 평범하게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대화가 흘러나왔다.
"자제분께는 말씀하셨어요?"
상대방에게 들킨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타이밍을 봐서….라고는 생각하지만, 결국 말하지 못하고 끝나게 돼."
아빠의 고뇌가 담긴 목소리에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렇구나, 저기, 주제넘은 말이라는 건 알겠지만요."
"응."
"제가 따님이라면 알고 싶을 것 같아요. 아버지의 인생에 있었던,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에 대해서요."
여자의 말을 듣고, 계단을 뛰어 올라가서 ‘역시 꺼림칙한 일이었잖아!’하고 단언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건 오늘 있었던 산행의 피로 때문이 아니라, 아빠가 어떻게 대답할지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불었다. 심술쟁이 바람속에서, 문득 장난기 가득한 여고생 같은 표정을 느낄 수 있었다. 무심코 옆에 앉은 안즈를 쳐다본다. 그녀는 별거 아닌 말을 했다.
"물어보는 게 어때?"
"하지만, 뭔가가…."
"같이 가 줄게. 괜찮아."
든든한 친구의 말을 의지해, 나는 마음을 굳혔다. 계단을 단숨에 올라가 당당한 태도로 아빠가 답을 하게 만들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쉽게 되지 않았다.
어째선지 혼자서 이쪽으로 돌아오고 있던 아빠와 눈이 마주쳤다. 놀란 건 둘이 동시였고, 역시 부녀지간이라고 해야하나, 똑 같은 톤으로 ‘우왓’이라는 목소리가 묘지에 울려퍼졌다.
"후유미, 어째서?"
"아저씨, 안녕하세요!"
묘하게 활기찬 안즈의 인사에 이제서야 두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된 듯 다시 한 번 놀란 표정이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어떻게 해야 할지, 이런저런 변명도 생각해봤지만, 여기선 강행 돌파를 하기로 했다.
"아빠, 좀 전의 이야기, 들려줘."
"아까 이야기라니……"
"둘 도 없이 소중한 사람이라니, 누구야?"
나도 모르게 공격적인 목소리로 변해버린 나에게 아빠는 눈을 크게 뜨곤, 무언가 생각을 한 듯했다. 그리곤 분명 그렇게 될 것이라 예상한 대로 체념하고, 우리에게 계단을 올라오라고 했다.
아빠의 뒤를 따라 올라가니, 마침 그 계단에 있는 무덤들의 중간쯤에 아까 그 여자가 서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보니 역시 우리와 별로 나이차가 나지 않아 보이는 여자애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빠가 내게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 얘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약간 복잡한 짜증이 고개를 들었다.
여자아이는 놀라서 우리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빠는 정중하게 비켜서서 우리를 소개했다.
"음……."
뭘 숨기랴, 딸이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기에 그렇게 힘든지. 아, 그렇지. 사상애나 바람이라면 말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겠지.
"갑작스런 소개로 미안하지만."
여자애는 당연히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어쩌다가? 만난, 이쪽 얘가 내 딸, 후유미."
"…..안녕하세요."
일단 고개를 숙이자 여자애는 ‘아아~’하고 목소리를 냈다. 깜짝 놀란 듯한 그 목소리. 그 끝에는 약간이나마 즐거운 듯한 목소리가 섞여 있는 게 신기했다.
아빠는 내게 그 애를 소개하기 전에, 이번에는 안즈를 가리켰다. 안즈는 묘지를 바라보던 눈을 소녀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이 아이가 안즈. 후유미의 소꿉친구이자, 쿄코네 장녀."
"처음 뵙겠습니다. 어머니가 신세를…."
적당히 대충 말하고선 꾸벅하고 부자연 스럽게 고개를 숙이는 안즈에게 여자애는 또다시 ‘아아~’하고 놀란다. 쿄코 아줌마도 알고 있다는 건 의외였다. 정말이지 누군데?
여자아이는 ‘만나서 반갑습니다.’라고 정중히 우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를 지켜보던 아빠는 드디어 좀 정중함이 심하게 인사를 한 정체불명의 불륜 상대 후보 사생아 의혹 소녀의 소개를 시작했다.
"이 사람은 야마우치 료우카씨야."
료우카, 아빠가 전화했던 상대다. 하지만 성은 모른다. 들어본 적도 없고.
그걸 표정으로 드러내자, 아빠가 여자에게 향했던 손을 옮겨 거기에 있던 무덤을 가리켰다.
"이 무덤에 잠들어 있는 사람의, 오빠의 딸이야."
"안녕하세요. 아버님께 많은 신세를 지고 있어요."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는데, 어떤 신세를 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대답이 곤란하다. 무시하는 것도 좀 그래서 ‘에이, 아니에요….’라고 얼버무리며 무덤을 보니 확실히 거기엔 ‘야마우치가’라는 글자가 있었다. 그런 친척도 지인도 있었던 기억이 없다.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인 와중에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이 있었다.
이렇게 당당하게 나에게 인사할 수 있는 불륜 상대는 없을 것이다. 물론 사생아도.
그런 걸로, 내 소중한 여름 방학을 망친 추격전은 헛수고로 끝난 것 같았다. 안즈가 몰래 내 등을 살짝 찔렀다. 아무래도 나중에 파르페를 사야할 것 같다.
아니, 그럼, 뭐냐고?
"그래서, 후유미와 안즈는, 왜 여기에 있니?"
"이 묘지에 있는 사람, 누구야?"
누명을 씌우고, 그것도 모자라 따라왔다는 걸 들키면 우리 입장이 곤란해질 것 같아서 얼버무렸다. 물론 흥미가 있었던 것도 있고.
아버지는 내가 얼버무린 거에 대한 게 아니라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은 왠지 모르게 안즈를 바라보더니, 그리곤 나를 보았다.
딱히 바람이라도 피운게 아니라면 시간 끌지 말라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뜻밖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들은 적이 있으니까요."
안즈는 그렇게 말하면서 묘지로 시선을 돌렸다. 어? 알고 있었어? 뭐를?
설마했던 안즈의 배신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안즈, 무슨 소리야? 여기에 와 본적 없는 거 아니었어? 거짓말한 거야?"
"온 적은 없어. 하지만, 좀 전에 생각난게 있어. 괜찮아. 내가 중요한 일로 후유미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으니까."
안즈의 눈은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엇, 어떠려나.
내가 오랜 우정에 금이 갈 것 같은 걸 생각하고 있으니, 아빠가 체념한 듯 ‘알았어’하고 말했다.
그리고 아빠는 조금씩,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며 나에게 그 묘지에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막힘없이. 애정을 담아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나는 절규했다.
쇼크를 받았던 거였다.
내가 몰랐던 아빠의 과거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경험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에.
지난번 아빠가 왜 그토록 나를 바로잡으려고 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아빠는 삶과 죽음이라는 것을 몸 가까이 현실로 알고 있었다. 나와는 다르게.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아빠가, 그 옛날에 있었던 사람을, 지금도 마음속으로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단순한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말투와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였기 때문에 의심할 수도 있었을텐데, 스마트폰으로 사건에 대해서 알아볼 수도 있었을 텐데도 믿게 된 건 아빠의 말투와 표정이 결코 가상의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마친 아빠에게 딸로서 할 말이 많았을 텐데,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가장 궁금했던 것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직도, 그 사람을 좋아해?"
알고 싶어서 물었다. 그러자 아빠는 한 번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옅은 미소를 띄며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후유미가 생각하는 것처럼, 예를 들어 애인에게 향하는 것과 같은 그런 감정을 그녀에게 품고 있었던 건 아니란다."
"하지만, 친구는 아니었잖아?"
"친구는 아니었어. 연인도 가족도 아니었지. 친한 친구라고 그녀는 말했지만, 그것도 어딘가 다른 기분이 드네."
"잘 모르겠어."
"응, 분명 아무도 모를 거야."
미적지근한 말투.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즐거웠어?"
어린아이 같은 나의, 분명 조금은 심술궂은 질문에 아빠는 한층 더 깊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 즐거웠고, 특별한 시간이었어."
그렇, 구나.
"하지만 후유미."
아빠는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아닌, 나에게만 말을 건넸다.
"한 가지만 알아줬으면 좋겠어."
그런 변명으로 무슨.
"가장 즐거운 건, 지금이란다."
갑작스러운 부끄러운 선언. 하지만 아니겠지. 나는 며칠 전 아빠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엄마와 만나서, 후유미가 태어났고. 건강하게 자라줬지. 평온한 매일이라도 너희들이 있는 지금보다 더 행복했던 적은 내 인생에 없었어.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고. 믿어줬으면 좋겠다."
정말 똑 부러지게, 아빠가하는 말이기에 나는 뭔가 근질거려서 무심결에 묘지 쪽으로 눈을 돌려버렸다. ‘아 그래’하고 한 마디로만 수긍했다.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몰라 조용히 무덤을 바라보고 있자, 안즈가 ‘아저씨’하고 말을 건넸다.
"그렇게 말씀하실 거면, 후유와 함께 참배하러 왔으면 좋았을텐데요…"
안즈의 친구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이 담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니 아빠는 ‘정말 그렇네’하고 솔직하게 수긍했다.
"언젠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랐어. 후유미. 미안해."
사과를 받아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나는 또다시 ‘아 그래’라고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또다시 묘지를 도피처로 삼는 동안, 료우카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그녀와 아빠가 직접 연락을 주고받게 된 것은 최근이라고 한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이모에 대해 알고 싶어서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더 이상 다툼을 이어갈 독기도 뽑혀버려서 묘한 고요함을 남긴 채 우리 넷은 함께 성묘를 하기로 했다. 물을 붓고 아버지는 무슨 이유인지 가져온 매실주를 공양하고 있었다. 돌아가셨을 적엔 고등학생 아니셨나, 하고 잠깐 생각했다.
물통을 치우는 등 뒷정리를 다 끝내고 났을 무렵에 아빠가 쓸데없는 걸 생각해냈다.
"그런데, 진짜로 왜 이런 곳에 있었니?"
"…….엄마한테는 아빠가 옛날 여자 얘기 했다고 전해 둘게."
농담인데도 아빠는 정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 같으면 웃어넘겼을 텐데,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그 얘기는 거기서 멈췄다.
언덕을 내려와 전차에 타고 원래 있던 역으로 되돌아온 뒤, 료우카씨와 헤어졌다. 헤어질 적에 다음에 같이 밥 먹으러 가자는 말을 들었다. 의심했던 걸 언젠가 웃으며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연락처를 교환했다.
우리 동네에 있는 역까지 와서, 이제 아빠와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했더니 안즈가 갑자기 ‘그럼 가볼게’하고 불쑥 말했다.
"파르페는? 괜찮아?"
"달아둬. 오늘은 아저씨에게 후유미를 양보할 테니까. 가능한 사이좋게 지내줘."
안즈는 살며시 내 등에다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곤, 내일 만나기로 한 뒤 곧장 자전거를 타고 가 버렸다. 안즈 나름대로 신경을 써준 거겠지만, 조금은 이 색한 분위기에 나 혼자 두지 말아뒀으면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겠지.
알고는 있었다. 여기서 어색함을 없애지 않으면 이 일이 계속 꼬리를 물고 늘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도 자전거를 타고 역까지 왔었다. 아빠가 먼저 돌아가도 된다고 말했지만, 나는 오랜만이니까,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 사달라는 등의 이유를 붙여서 함께 걸어가기로 했다.
해가 지기 시작하고, 조금은 시원해진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아무것도 아닌 척을 해가며, 했다. 기본적으론 내가 안즈나 료우카씨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아빠는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단순한 시간 벌기였다.
드디어 할 이야기가 없어지고, 뭔가 의미 있는 말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무슨 이야기를 해야 이 어색함을 해소할 수 있는 걸까?
아니, 사과해야만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빠도 내게 사과했다. 빚을 진 상태이기에 어색한 것이다.
사과해야만 해. 시시하다고 했던 걸.
아빠가 고등학생 시절에 특별한 경험을 했기 때문, 이 아니라. 나와 엄마가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아빠의 인생을 바보취급한 것을.
하지만, 막상 말하려고 하니, 그런 말을 골라서 하려고 하니 부모 자식 사이라는 게 이렇듯 불편한 사이라, ‘어…’라든가 ‘으….’라던가 하는 말만 나오고, 입이 열리지 않았다.
노력은 해봤지만, 역시나 어색함이 이기고 말았다.
대신에, 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말을 시작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아빠, 는, 어떤 인생을 고른 거야?"
내 진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였다.
"출판사에서 일할 생각을 하기 전에, 예를 들어 고등학생 때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의사가 되고 싶었다던가 그렇진 않았어?"
그 질문은 생각했던 것보다 아빠의 마음속 소중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고, '그러게.'하면서 아빠는 한참 동안 진지하게 생각해 주었다.
"그런 선택지도 있었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나는 그녀의 죽음에 내 삶을 덧씌우진 않기로 했어."
"왜?"
"내가 그녀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을 인정하고 살아가라는 거였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것, 중요한 것을 고민하고, 삶을 선택해왔어."
그렇게 해서, 아빠는 지금의 평범하게 짝이 없는 매일을 손에 넣었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러면 좋겠어?"
"아니, 후유미는 후유미 자신의 생각으로 미래를 선택했으면 해. 이것도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고."
"그래."
적당히 맞장구만 치고 말았다.
결국 중요한 말을 꺼내지 못하고, 별거 아닌 잡담이나 하다 보니 집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사과할 수 있는 타이밍은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나는 끝까지 사과하지 못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전거를 세웠다.
어쩔 수 없네, 하고 생각했는데 아빠가 자전거를 두고 온 나를 ‘후유미’하고 불렀다.
"중요한 걸 지금까지 숨겨서 미안해."
"….사쿠라씨에 대한 거?"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빠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있는 게, 특별하다는 거."
뭐야 그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욕설 같은 그런 말이었지만, 동시에 솟구치는 기분이 꾹 응축되어 내 등을 살며시 밀어주었다.
‘나도, 미안.’ 이라는 단 한마디였다. 단 한마디였지만, 사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와 아빠는 평소와 같은 집에 평소처럼 돌아왔다.
"파더콤."
여름 방학의 어느 날, 만나자마자 안즈가 꺼낸 말이 그 말이었기에 파르페에 관한 건 백지화해버릴까 하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어제에 있었던 일에 대해선 나도 부정할 수 없었기에 조용히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뭐, 잘됐네. 비온 뒤 땅이 굳는다는 게 이런 거지, 아 껌 씹을래?"
"필요 없어. 응-. 뭐, 여러가지로 생각해볼 계기가 되긴 했지-. 일단 자유인은 끝을 보고 왔어."
"잘됐네. 분명 다음에 또 비슷한 거에 휩쓸릴걸."
꼭 한 마디 쓸대 없는 말을 더하지 않으면 못 사는 듯한 소꿉친구는 오늘도 즐거워 보이기에 다행이다.
"행복해지려고."
"지루해도 괜찮아?"
"내가 행복해지는 걸 우선하면 지루해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아직은 어렴풋하게 밖에 알 수 없지만,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와, 그리고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는, 아빠 추억속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고서.
"그런데 후유, 과거 이야기보다 미래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괜찮아?"
"그럼 그럼"
"어제 엄마랑 이야기했더니, 전에 말했던 후유랑 둘이서 여름 방학 동안 여행하는 거 허락해줬어."
"오오-! 과보호로 자란 안즈가 여행을 떠난다는 걸 잘도 허락해 주셨네?!"
"그러게-. 귀여운 딸이 며칠간 집에 없는 걸 엄마 아빠가 견딜 수 있을지 걱정돼."
"인형이라도 두고 와."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미래에 있을 새로운 희망에 가슴 설레는 우리를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쓰다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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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페이지에도 있지만 번역에는 번역한 사람의 의견이나 선입견 등이 반영됩니다요. 가능하다면 원문 읽어보시기를...
와 국어로 옮기는 거 진짜 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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